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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안개(김승옥)

“안개가 안 개”

낯가리는 방장놈 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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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탈한 눈으로 창 밖을 내다 보면 뿌연 안개 속에 무진의 새벽 상가가 지나가고 선명한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 〈안녕히 가십시오. 당신은 무진 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빙 돌아 뒷면에는 〈어서 오십시오. 당신은 무진 읍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109 찦차 안 이른 아침 中)

 

오늘은 비 오는 어린이날입니다. 남부 지역과 제주 지역에 폭우가 쏟아졌다고 하는데 피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소설 <무진기행>을 각색한 영화 <안개>의 시나리오입니다. 무엇보다 무진의 특산물, ‘안개’ 묘사가 기가 막힙니다. 이어령 선생님의 추천사(무진기행 평론 中)가 이를 뒷받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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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생활이 난파할 때, 때때로 우리는 그 장소로 간다. 즐거운 듯한, 쓸쓸한, 그리고 무의식의 내면 속에서 “무진”의 안개는 피어오르는 것이다.”
 

영화 <안개>에서 묘사된 무진의 안개는 마치 생태학자 델리안 오언스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 해안 습지 묘사 같습니다. 두 책 모두 줄거리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게 합니다. 하지만 각 묘사 부분은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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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들은 카야한테 아무 관심도 없이 쫙 펼친 날개를 단장하고 나서 털이 보송보송 달린 바윗돌처럼 바닷가에 자리를 잡았다. 갈매기들이 조용히 흡족한 웃음소리를 내고는 머리를 날개 밑에 넣고 잠이 들자, 카야는 최대한 갈매기들 곁에 바짝 몸을 붙이고 누웠다.”

(43 / 현미경 中)

 

책을 읽으며 영화 <헤어질 결심>이 떠올랐습니다. 알고 보니 영화 <안개>의 주제가인 노래 <안개>가 영화 <헤어질 결심>에 영감을 주는 건 물론 OST로 다시 사용되었더군요.* 영화 <헤어질 결심> 각본은 제가 다시 책을 읽게 한 계기입니다. 영화를 보지 않은 덕분에 통역기는 어떤 억양으로 읽혔을지 모릅니다. 해준은 기준과 달리 제 상상 속 바닷가에서 헤맬 뿐입니다.

 

이밖에 소설 <무진기행>하면 떠오르는 글이 있습니다. 김훈 산문 <라면을 끓이며> 중 바다 편입니다. 이전 편 광야를 달리는 말에서 저자는 자신의 아버지가 문인 친구들과 무진기행을 발표한 청년작가 김승옥 이야기를 술 한 잔에 밤새 나누었다는 이야기를 남깁니다.

 

“이제 우리들 시대는 갔다”며 고래고래 말하는 아버지와 문인 친구들에게 식은 안주를 가져다드린 저자는 이제 “주여 망자에게 평안을 주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로 글을 마무리 짓습니다.

 

김승옥과의 인연을 뒤로 하고 저자는 이어지는 바다 편에서 자신의 기행을 풀어씁니다. 2012년 초가을부터 2013년 봄까지 머문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바닷가를 머문 경험입니다.

 

빠르게 걸으면 두 시간 소요하는 산책 코스(해양연구소 → 후정해수욕장 → 111반점 앞 → 죽변항 → 수산물 위판장 → 카페 피렌체 → 대나무숲길 → 드라마세트장 → 죽변등대)를 경로 순서로 묘사하는 공간의 여정은 마치 함께 여행을 가는 듯 간접 경험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참 기행이라면 기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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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변등대는 내 아침산책의 끝이었다. … 지구상의 모든 등대들 중에서 죽변등대만이 ‘20초 1섬광’이다. 배들은 그 섬광을 보고 죽변항의 위치를 알고 자신의 위치를 인식한다. 상대의 위치를 알아야 나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나 혼자서는 나의 위치를 알 수 없다.”

(1부 밥, 바다. 61~62쪽 中)

 

<안개> 하나에서 여러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사실 하고픈 말은 더 있지만 글이 산으로 갈까 여기서 마무리합니다. 영화 <헤어진 결심>을 인상깊게 감상하신 분이라면 원작을 읽는 설렘으로, ‘묘사’ 기법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안개’를 대체 어떻게 묘사했길래 하는 호기심으로, 여행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무진(가상공간)에서 여정을 주인공(기준)과 떠나보심은 어떠신지요.

 
 

*“정훈희 '안개', 영화 '헤어질 결심' 타고 스트리밍 2,350% 증가”, <씨네21>, 2022.07.13.

 

** 노래 <안개>의 작사가는 김승옥 작가 본인이었지만 노래 작사가가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름으로 올라간 걸 알고 영화 음악감독 이봉조 씨에게 물으려 했지만 고인이 되어 아쉬울 따름이다. (작가의 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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