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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작은 땅의 야수들(김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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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장 : 정호는 그 매끈한 녹색 조약돌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서로를 간직하려 하는 그 모든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방식들 — 단어, 기억, 몸짓, 감정을 담뿍 담은 소중한 무언가가 되었다가 다시 아무 의미 없는 물건으로 돌아가는 것들 — 이 그의 손바닥에 평온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 출처 : [2부] 1925년~1937년 18장 비 오는 밤
 
  • 생각 : 문장 속 매끈한 녹색 조약돌은 어린 정호가 주인공인 옥희를 만나기 위해 담장 너머로 던진 일종의 기약입니다. 훗날 녹색 조약돌은 옥희와 정호를 다시 연결합니다. (이전의 감정보다 못하고 입장도 반대가 되지만) 문장에서 “단어, 기억, 몸짓, 감정을 담뿍 담은 소중한 무언가” 문구가 눈에 들어옵니다.

    제게 녹색 조약돌 같은 존재는 ‘손편지’입니다. 지금에야 손편지는 정말 특별한 날에만 만날 수 있습니다. 손편지를 보관한 전용 상자도 있습니다. 친할아버지가 물려주신 녹슨 총탄 보관함인데, 당신께서는 현금을 보관하는 금고로 사용하셨지만 저는 손편지를 담아두었습니다.

    한 자 한 자 끄적인 소중한 편지들이 있어 아주 가끔 괜스레 헛헛할 때면 꺼내 읽곤 했습니다. 편지를 들추면 왠지 그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어 마음이 울렁입니다. “그때 왜 그랬지” 하는 순간을 기억하며 편지를 도로 집어넣는 건 한결 같은 마무리입니다.

    글을 쓰며 금고도 오랜만에 열었습니다. 말 그대로 편지도, 금고도 “단어, 기억, 몸짓, 감정이 말 그대로 담뿍” 함축해 있지만, 시간이 흐른 것 만큼 의미도 퇴색해 이제는 정호의 녹색 조약돌 같은 존재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작은 땅의 야수들>도 비슷한 감정입니다. 마지막 옮긴이의 감사 인사까지 읽으며 홀가분함을 느끼기보다 “다시 아무 의미 없는 물건으로 돌아가는 것들”처럼 공허하기까지 합니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6.25전쟁,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근현대 역사를 여러 인물의 다각적 관계로 끊임 없이 엮어낸 작가의 역량과 세밀한 문장력이 그래서 더욱 인상 깊게 느껴집니다.


    (작성일: 2024.10.24.)